30년 만에 찾아온 폭염(暴炎)이라고 뉴스는 말합니다.
한강을 찾아 무더위를 식혔던 과거와 달리 요즘은 에어컨이 있는 실내를 찾습니다.
에어컨이 없는 것을 상상할 수 없습니다.
당연한 것(?)이라 말하지만, 은혜입니다.
지금 누리는 것, 지금까지&여기까지 인도하신 모든 것이 은혜입니다.
본문의 주제는 ‘용서(눅 17:1-4)’입니다.
제자들은 용서를 위해서 큰 믿음이 필요(?)하다(5)고 봤습니다만,
예수님은 작은 믿음으로도 충분하다(!) 말씀하십니다(6).
이를 설명하기 위해 「무익한 종의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결론부터 이야기하면, 참된 그리스도인이라면 당연히 해야하며, 할 일을 한 것뿐이라고 말해야 한다는 겁니다.
누가복음의 저자, 누가는 ‘밭을 갈거나 양을 치는 종(7)’으로서 증인의 삶을 살아야 한다(!)고 외치고 있습니다.
cf) 누가는 사도행전의 저자이기도 합니다.
요컨대 사도 바울이 선교여행을 마치고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고자 합니다.
그런데 제자들이 위험하다며 만류합니다.
하지만, 바울은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을 생명걸고 다하겠다(행 20:24)”고 말합니다.
이 상황에서 “여러분은 자기를 위하여 또는 온 양 떼를 위하여 삼가라 성령이 여러분을 감독자로 삼고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보살피게 하셨느니라(행 20:28).” 라고 응원합니다.
교회와 하나님 나라, 주의 영광을 위해 부르셨으니, 그 일을 기꺼이 감당해야 한다(!)는 겁니다.
어떤 일입니까?
저는 우리 교회 표어를 빌어 “생명을 살리고 평화를 노래하는 일” 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문제는 세상이 평화가 아닌 분열(分裂)을, 생명이 아닌 죽음을 조장합니다.
이러한 어둠의 권세 가운데, ‘섭섭마귀’는 그 주역입니다.
가정과 공동체를 깨뜨릴 때, 어김없이 서운하고, 섭섭한 것들이 떠올라, 불평과 원망을 일으킵니다.
그러나 예수 믿는 사람은 섭섭하지 않기로 결단한 사람들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이미 죽었기 때문에 섭섭할 이유가 없습니다.
본문은 하루종일 일하다가 집에 돌아온 종의 이야기입니다.
지친 일상을 뒤로하고 쉬고 싶은 마음 간절하지만,
주인의 식사를 준비하고, 수종을 들어야 합니다.
말 한 마디라도 “수고했다!” 라고 격려해주면 좋으련만,
“명한대로 하였다고 종에게 감사하겠느냐(9)” 반문하기까지입니다.
탕자의 비유(눅 15장)를 생각하면 이해는 됩니다.
일할 수 있는 것도 은혜, 수고를 마친 후에 식탁을 대할 수 있음과 쉴 수 있는 집이 있음도 그저 감사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서운하고 섭섭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본문은 자신의 정체를 확인하라(!)는 겁니다.
우리는 무익한 종입니다.
주님의 영광을 위해 지금&여기에 있습니다.
죽을 수밖에 없던 죄인이었으나, 값없는 은혜로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 은혜를 고백하며, ‘나는 곤고한 사람(롬 7:24)’이라 말합니다.
섭섭할 틈이 없습니다.
실제로 바울이 개척한 고린도교회에서 자신보다 더 사랑받고 존경받는 목회자가 있다(?)는 소문도 들었습니다만,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되어야 하며,
주님만 홀로 높임을 받아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예수님이면 충분하다(!)며,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기기까지였습니다(빌 3장).
예수님이 오신 이유도 마찬가지입니다.
생명을 살리기 위해서, 더 풍성하게 하기 위해서였습니다(요 10장).
그래서 기꺼이 사랑하고 섬기고, 희생, 죽기까지 낮아지셨습니다.
그러면서도 자랑하지 않았고, 그저 해야 할 일을 했다(!)고 말씀하십니다.
세례요한도 그랬습니다.
당연히 할 일을 행했을 뿐입니다.
오직 주님만이 흥하셔야 한다(!)고 광야의 외치는 자의 소리가 되었을 뿐입니다.
그랬더니 주님께서 그를 칭찬하셨습니다.
무더운 여름, 그저 우리가 해야 할 일을 감당하십시다.
수고(?) 아닙니다.
나와 함께하신 주님의 은혜입니다.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고전 1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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